독서 일기

도쿄 큐레이션 (이민경, 2023)

fast airplane 2025. 2. 21. 14:18

 

 

모처럼 재미난 책을 만났다.

내가 좋아하는 도쿄에 관한 책인데다

책 뒷표지에는 "도쿄라는 브랜드를 경험하는 여정"이라고 써있다.

이 얼마나 궁금하게 만드는 책인가.

 

이 책은 여행 가이드나 맛집 탐험기가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 문화를 본격적으로 분석한 책도 아니다.

한없이 무겁거나, 혹은 사진만 많고 내용물은 없는

가볍기만 한 책이 아니라서 일본 문화와

도쿄라는 도시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 번 읽어볼만한 책이다.

 

책 표지에는 "에디터 관찰자 시점으로 전하는

6년의 기록"이라고 되어있다.

(여담인데 "에디터"라는 직업은 왜 한글로 쓰면 안되는 걸까?

저자는 잡지 기자 출신이신 것 같은데, 에디터라고 하니

이게 잡지사 에디터인지 출판사 에디터인지 학술지 에디터인지

헷갈리며 에디터라는 단어만 보면

저자의 직업인지 무엇인지 바로 떠오르지도 않는다. 

왜 꼭 에디터라는 영어를 써야하는 걸까?

편집자나 기자라고 쓰면 안되는 건가?)

 

어쨌건 에디터 출신이라 그런지

재밌는 잡지를 읽는 느낌도 들었고

감각적인 문장들때문에 지루한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단점은 맞춤법 틀린 곳들이 너무 많다는 거.

본인이 에디터라 proofreading을 안한 건지 

모르겠지만 틀린 맞춤법이 계속해서 나와 좀 거슬렸다)

 

나도 도쿄를 10번 넘게 방문해보았고

도쿄라는 도시는 늘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도시라서

한 챕터 한 챕터 재밌게 읽었고,

밑에 나오는 벚꽃 하나미 얘기를 읽을 땐 살짝 눈물도 났다.

 

약간 불편했던 점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진리가 꼭 도쿄에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거.

물론 일본 문화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장점을 찾으며

단점도 그 단점으로 단정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저자의 열린, 긍정적인 태도는 무척 높이사지만

이 세상의 진리가 꼭 도쿄에만 있는 건 아닐텐데.

 

 

 

 

외면하고 싶은 진실들과 마주하는 것.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것이야말로 도시의 진짜 민낯을 만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연하고 치밀한 디테일의 아름다운, 투철한

장인 정신과 이보다 완벽할 수 없는 오모테나시, 그 뒤에 숨은

보수적인 획일주의와 변화를 두려워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사회적 토양, 사무라이 문화 등 일본의 빛 못지않게 그림자

또한 제대로 볼 줄 아는 것이 이 시대의 도쿄, 나아가 일본을

바라보는 균형감있는 시선이 아닐까 싶었다. (12)

 

이 곳에 살며 가장 크게 느낀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세상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각이다. 일본인은 자기 앞의 생은

물론이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을 '망원경'이 아닌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물체와 현상을 최대한 미세하고

정밀하게 관찰하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얼핏 숲보다는

나무 한 그루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지만, 세상에는 망원경이

있으면 현미경도 필요한 법. (61)

 

건축이란 낙후된 지역 사회를 살리고, 자연과 공존할 가능성을

높이며 사람들의 삶의 두께를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에 깊이 감동했다. (88)

 

안도 다다오는 건축가이기 전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한 여운으로 남는 이유다.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어느 정도 길은 열립니다."

 

영상 후반부 그의 말이 내게는 엄청난 힘이 됐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뛰어넘은 담대한 여정이 가슴 벅찬

울림과 경쾌한 용기를 전한다. 그 결과물이 도시의

풍경을 그리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니,

이보다 더 큰 긍정의 기운도 없었다. (89)

 

벚꽃은 봄,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재생과 유한함 같은

삶의 본성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다. 불과 2주 동안 짧은

시기에 화려하게 피었다가 한순간의 꿈처럼 사라지는

속성을 가진 까닭이다. 이 웅장하지만 짧은 수명은

우리의 인생 또한 결코 길지 않다는 진리를 일깨워준다.

그러니 이 인생에서 최대한 좋은 것을 보고 즐겨야 한다는 것,

우리도 우리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쳐주는 것 같다. (202)

 

한편으로 어떤 기억이 마음에 뚜렷한 사진을 남기 위해서는

감동이 필요하다. 마음이 동하는 것 말이다. 그건 일생일대의

사건보다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남과 헤어짐, 시작과 끝, 혹은 완성이라는 그런

거창한 단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내가 본 구름의

움직임이랄지,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들었던 음악, 혹은 안녕을

고하는 친구의 뒷모습에 비추던 햇살과 그림자에 있다. 

 

내년 봄을 기약한다. 천년이 넘은 역사를 지닌 하나미 행사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산책을 하고, 피크닉을 열며 술을 마시고 또 바비큐를 즐길 것

이다. 그 장면들 속에서 자신만의 찬란한 벚꽃을 발견할 것이다.

찰나에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하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순간임을,

이제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206)

 

맛있는 음식 앞에서 난데없이 코끝이 찡해지던 경험은

바로 영혼을 울리는 맛이었기 때문일까. 먹는 인간의 영혼에

전해지는 그런 맛을 떠올려본다. 주문한 음식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셰프의 눈빛에서,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준비하는 분주한 주방의 풍경에서, 어느 날은

몸이 좋지 않다고 하니 메뉴에도 없는 오카유 (쌀과 물로만

만든 일본식 죽)와 오카즈(반찬)을 준비해준 단고 이자카야의

한상 차림 앞에서, 나는 적잖이 감동했다.

 

그 소중한 감동의 순간들이야말로 단순한 장사나 철저한

매뉴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손님의 상황이나 상태, 기분과 입장을

미리 헤아려 행하는 마음 씀씀이다.

 

오모테나시는 진심만으론 부족하다. 자신의 일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어떤 것이다.

오모테나시가 일본을 대표하는 서비스가 된 것은 이 진심에

'성의'라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이 더해져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말은 쉽지만 매 순간 온 마음을 다해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17)

 

살면서 굴욕적인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제법

괜찮은 모습으로 살아남았고, 나의 여행은 이렇게 계속

돼도 괜찮을 것 같았다. 화석처럼 굳은 상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이다. (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