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일기

읽는 직업, 이은혜 2020

fast airplane 2021. 12. 5. 14:33

이 책은 정말로 놀라운 책이다.

웬 이상하고 흥미끄는 제목으로 낚은 후

정작 내용은 없는 신변잡기식 책들이 넘쳐나는 요즘,

이렇게 밀도가 가득찬 책을 만나게된 건 행운이다.

직접 책을 보고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인터넷 서점에서 대충 훑어보고 산 책 중에

흔치않게 이런 보물을 만날 때면 정말 횡재한 기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은 20년도 더 넘은

내 중학교 시절이 잠깐 생각이 났다.

 

중학교 때 도덕 시간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도덕" 수업은 "윤리"라는 제목의 수업으로 바뀌었다)

중 지금도 기억나는 선생님이 계시다.

지금 생각해도 참 특이하고 앞서가는 사고 방식을 가지셨던 선생님이었다.

특히 숙제가 항상 특이한 숙제들이었는데

신문 사설을 읽고 원고지 한 장 분량으로 요약하기는 매주 있었던 숙제였고

가끔씩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글로 써내라든지

아니면 직업에 관하여 알아본 후 글을 써보라는 숙제도 있었다.

글쓰기 교육이라는 개념도 거의 없었을 90년대에

저런 숙제를 내주셨다는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해도

참 훌륭한 수업이 아닐 수 없었다.

사설을 요약해서 원고지 한 매로 요약하는 매주 있었던 숙제는

2점이 만점이었고 내기만 해도 1점은 받는 숙제였는데

공부를 상당히 잘한다고 자부하던 애들도 항상 2점씩 받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ㅋㅋㅋㅋ)

딱 한 번, 제일 첫번째 요약에서 1점을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내가 요약을 못해서라기보다

당시에 선택했던 중앙일보 사설이 너무 엉망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다.

실로 선생님께서도 중앙일보랑 한겨레 신문 사설이

제일 별로라고 수업 중에 얘기하시기도 햇다. 

 

아무튼 그중 또 하나의 숙제가 아무런 직업이든 "직업"에 관해

조사를 해보고 그 직업에 관해 궁금한 점에 대해

답을 알아보고 써보라는 숙제였다.

난 괜히 뭔가 좀 특별한 직업을 써보고 싶어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써냈는데-_-;;

인터넷도 없던 그 당시에 대통령에 대한 직업에 대해

그냥 두루뭉술하게 써내 5점 만점에 3점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_-

사실 당시 내가 갖고싶어했던 직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쓰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지금도 한다.

왜 난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택해서 3점이라는 점수를 받았을까...

실제 수업 시간에도 그 선생님은 말씀하셨었다.

대통령이란 직업에 대해 쓰는 학생들이 몇 있는데

대통령은 직업이라기 보다는 직책을 의미하는 것이라

이 숙제에 적합한 직업은 아니라고...-_-

내가 그때 만일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나는 단연코 편집자라는 직업을 택해서 숙제를 마쳤을 것이다. (ㅋㅋㅋ)

 

아무튼 그 후로 나는 남들의 직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관심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걷는 사람들의 그 직업에 관한 이야기.

그런 면에서도 이 책은 꽤 흥미로운 책임이 분명하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편집자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조차

아마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책을 좋아하지만, 편집자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하는 직업인지

궁금해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책을 쓰는 저자라면

이런 편집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 편으론 이렇게 사명감과 책임감을 다하며

끊임없는 자아성찰을 하는 내공 가득한 편집자와 함께 일하다보면

나의 비루하기 짝이 없는 소양이 단 번에 들킬까봐

겁이 나기도 한다)

 

보통 내가 모르는 생소한 어떤 직업에 관한 책을 읽어도

대체로 반 이상은 그 직업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일하면서 느꼈던 감정이나 소소한 에피소드들로 가득찬 책들이 많은데

이 책은 그런 신변잡기식 책이랑은 차원을 달리하는 책이다.

 

이 책에는 참으로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고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양한 저자들의 철학이 가득한 인문학 책이다.

난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저자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여기에 독후감이라는 이름으로

내 얄팍한 지식으로 더한 감상을 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좋은 문장 몇 개를 추리는 것으로 감상을 대신해야겠다.

 

"이런 저자 앓이의 역사는 짧지 않고

멈추기 힘들 만큼 때로 중독성이 있다.

그걸 덮을 수 있는 것도 그가 열어준 세계

혹은 다른 저자들이다. 나는 또 M을 좇아 베르너

좀바르트를 읽고, 조르주 바타유와 시몬 베유, 울리히

베크를 읽었다. 다행히 M, W와는 아직 헤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들에게 나를 내어준 채 스며들 준비가 되어있다.

저자들에게 매혹되어 밤새 글을 읽으며 그들의 궤적을 좇고

앓기도 했던 기억들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내가 황혼에 접어들었을 때 실패한 관계보다

친밀한 관계가 더 많이 기억되길 바라고,

나 또한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단서를 책과 사람 안에서

찾고 싶기 때문이다." (25)

 

"가난하지만 그는 꿈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다.

그래서 편집자는 작가의 가난을 안타까워할 때가 있을지언정

그들을 동정할 수는 없다. 작가는 우리가 동정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작품에서 타인들을

점차 깊이 만나고 그러면서 더 확장된 세계로 진입한다.

편집자나 독자는 알 수 없는 그러한 세계로. 그런 작가의

손에서 진귀한 작품들이 나오곤 한다. 몇 번 포기하려고 

마음먹은 데서 끝까지 가봤을 때 남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의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60)

 

"그들은 그동안 '왜 편집자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고

남의 글만 만지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던 듯 하다.

자칫 편집자의 일을 폄하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고,

이 직업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중간기착지 정도로만

여기는 듯한 뉘앙스도 있다. 또 편집자는 작가가 되려하거나

혹은 작가가 되고 싶은데 되지 못한 이들의 직업이라는

의미도 내포할지 모른다. 내심 이 직업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들어가며 두 저자에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문득 나와 일했던 세 편집자가 마침내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러지 못했다." (161)

 

"나는 이 책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편집자가

꼭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이 점점 바뀌어 편집자는 글이든 책이든

써야한다고 여기게 되었다. 가령 글쓰기는 삶에 대해,

자신과 타인에 대해 귀속감 같은 것을 뿌리 내리게 한다.

다만 아직 쓰고 있지 않은 이들이 있다면 글 쓸 계기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그 계기가 주어질 때 분출시킬 만한

자원과 생각과 문장들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165)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책을 얼마나 사고 얼마나 읽어야 할까.

여기에 정답이 있을 리 없지만, 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한 달에 30만원 정도를

책 구입에 쓴다. 빌려서 읽는 경우는 없고 모두 사서 본다.

책값이 그것이 담고있는 가치에 비해 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특히 저자, 역자, 편집자들이 들인

시간과 노고를 계산하고, 그들의 생계를 고려하면 사실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책은 비싸다거나 혹은 산다고 해서

낭비가 되는 물건일 수 없다. 내 지출을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 대다수는 한 달 책 구입비가 5만원을

넘는 사람이 많을 것 같고, 10만원을 넘기는 사람도 꽤 있으리라 예상한다."

(224)

 

"책을 읽으면 삶이 나아질까. 여기에는 "꽤 그럴 것이다"라고

답하고 싶다. 삶에 있어서 '농도'나 '밀도'는 중요한데,

내 경우 그 밀도를 책을 읽거나 쓴 사람들과의 만남, 혹은

책을 둘러싼 수많은 내용을 통해 채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잘 모르겠다. 이렇게 책 한 가지만 이야기하며 마치 책 바깥의

삶은 없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싫어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책이 바로 그런 세계다." (225)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토록 훌륭한 편집자의

저자 소개가 너무 두루뭉술하다는 것.

요즘은 저자 소개에 학교 이름 안쓰는 것이 대세인 줄 잘 모르겠으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

"3년 6개월간 학술 기자로 근무"

어디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기관에서 어떤 분야의 학술 기자로 근무했는지

궁금한 건 비단 나 뿐인가?

학벌 사회에서 학교로 인한 편견을 갖지 않았으면하는

뜻일 거라고 생각해보지만 그래도 미래의 독자를 위해

기본적인 소개는 해주는 것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하는 생각.